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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1944년 (1~23세)

 

・ 1945년(24세)

・ 1947년(26세)

・ 1948년(27세)

・ 1949년(28세)

・ 1950년(29세)

・ 1951년(30세)

・ 1952년(31세)

・ 1953년(32세)

・ 1954년(33세)

・ 1955년(34세)

・ 1956년(35세)

・ 1957년(36세)

・ 1958년(37세)

・ 1959년(38세)

・ 1960년(39세)

・ 1961년(40세)

・ 1962년(41세)

・ 1963년(42세)

・ 1964년(43세)

・ 1965년(44세)

・ 1966년(45세)

・ 1967년(46세)

・ 1968년(47세)

・ 1969년(48세)

・ 1970년(49세)

・ 1971년(50세)

・ 1972년(51세)

・ 1973년(52세)

1922 - 1944년 (1 - 23세)

・1922년 4월 7일( 음력 3월 11일)에 함경남도 함흥군 신창리51번지 (1933년부터 함흥부 낙민정, 1943년 부터 함흥부 낙민리, 1950년부터 함흥시 낙민리로 변경) 에서 안동권씨 36대손 권정주( 權定周 )와 영춘조씨 석점의 차녀인 조춘(趙春)과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다 ( 장녀 춘득, 차녀 후덕, 장남 진원, 차남 진규, 삼녀 영숙, 사녀 경숙).

함흥평야의 중심 도시인 함흥은 동남으로는 동해에 접하고, 북으로는 진산반룡산(동흥산)이 우뚝 솟아 있으며 성천강과 호련천이라는 두 강이 흐른다. 주변에는 사과 등을 재배하는 과수원이 많다. 또, 이곳은 조선을 연 태조 이성계의 고향으로 양위 후에 머문 함흥본궁과 함흥성과 남화문, 태조가 명마를 잘못해 죽였다는 치마대, 정월 보름날 밤에 다리밟기하는 만세교 등이 있는 동북변경부의 최대 문화 도시이다.

아버지 권정주는 와세다대학 상과 전문부를 졸업한 후, 사업을 시작했다. 3층으로 된 서양식 건물의 양품점「송도옥」을 경영했으며, 부동산과 건축업으로 황금정지역을 재발견하는 등 경제적으로 풍족했다. 어머니 조춘도 유복한 참봉가 출신으로 재능이 많은 현모양처였다.

・1930년 4월, 함흥제1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9 세).

・1934년, 습성 늑막염으로 휴학한다(13 세). 고모부가 경영하는 노정의원에 장기 입원한다.

・1937년 3월, 보통학교 6년 과정을 졸업한다(15 세). 함흥공립중학교의 수험에 응시하나 낙방한다.

유년시절의 권진규는 장난꾸러기라고 불릴 만큼 활동적이고 명랑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여장하고 여동생들과 소꿉놀이를 즐겼으며 수영과 스케이트를 좋아했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는 밝고 활발한 어린이었다. 다만, 가벼운 연성형 말더듬이증이 있어 이를 신경쓰느라 길게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말더듬이증이 치료된 후로는 이러한 증상도 없어졌고, 성격도 침착해졌다. 이 즈음 아버지가 사 준 카메라로 사진촬영을 즐겼다.

또한, 공작에도 재능이 있었던 듯 하다. 성천강변에 자주 가서 모래나 점토를 가지고 개나 새 등 다양한 것들을 만들며 놀거나, 어머니를 위해 연필꽂이나 마루의 발판 등을 만들었다. 책꽂이의 양끝을 톱으로 잘라내고 토끼 형태로 바꾸거나, 낡은 스케이트의 칼날로 썰매를 만들고 요요나 연 등도 만들었다. 1935년, 함흥 상공회의소에서 행해진 전시회에 목제실패를 이용해 만든《사슴》을 출품해 입상한다.

・1938년 4월 5일, 춘천공립중학교에 입학한다(17 세).

부모를 떠나 강원도 춘천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게 된다. 1학년은 기숙사에서 보내고 2학년으로 진급하면서 기숙사를 나와 약사리 고개의 망대 아래에서 하숙을 한다. 4학년을 마칠 때까지 하숙생활을 하다가 5학년에 올라가면서 다시 기숙사로 들어간다. 고향도 아닌 춘천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된 배경 중 하나로 당시 안변군 신고산에 석회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아버지가 사업상 교분이 있는 춘천의 거부 지규설를 방문했을 때의 일로 호수가 많고 공기도 맑아 아들의 건강에 좋을 것으로 생각해 권진규에게 권하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당시 춘천공립중학교는 함흥공립중학교 다음 수준의 학교였으므로 춘천을 선택한다.

재학시절, 학내에서는 민족주의결사「상록회」나 민족의식이 강한 도서를 읽는「독서회」등으로 항일운동이 번성했다.「 상록회」는 1938년 12 월에,「독서회」는 1941년 2월에 각각 검거된다. 권진규는 이러한 학 내의 민족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2학년 2학기 수업 중에 조선을 멸시하는 와타나베 국어선생의 발언을 격하게 비판하는 등 자존심은 강했다.

・1940년 2월, 조선총독부의「조선민사령」개정, 창씨개명 공포에 의해「곤도 다케마사( 權藤武政)」로 개명한다(18 세).

・1942년 6월23일, 부여신궁 건립에 동원. 돌아오는 중에 논산 관촉사에 들러 참배한다.

・1943년 3월 2일, 제15회로 춘천공립중학교를 졸업한다(21 세).

신장은 1학년 때 160㎝, 5학년에는 164㎝였으며, 체중은 51~55㎏로 그다지 큰 체격은 아니었다. 4학년 개성조사표를 보면 거동란엔 소심, 단점란엔 용기가 없다는 내용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온순한 성질, 근면, 거동은 보통, 명료한 언어력 등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졸업시 인물사정요항란을 보면 성질은 온순, 사상은 견고, 언어는 명석, 상식은 풍부, 취미는 등산과 독서라고 기재되어 있다. 3학년 제3학기에는 총대표, 4학년 제2학기에는 급장, 5학년에는 기숙사 대표를 맡았다.「 책임감이 강하며 계속 노력함」이라고 평가받으며 통솔력도 인정받았으며, 우등생으로 졸업식에서 도지사상과 우등상을 받았다.

덧붙여 권진규의 미술성적은 학년에서 중위권으로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이 시절 동급생이나 함께 하숙했던 이들은 권진규에게서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작품을 제작하거나 했던 기억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졸업 후 곧 일변하여 조각가를 목표로 하게 된다. 권진규는 신학기 시작에 맞춰 일본으로 돌아가는 형 진원(당시 일본의과대학에 재학중)과 함께 도쿄를 방문한다. 히비야공회당에서 음악을 감상하던 중, 문득 음을 양감으로 표현할 수 없을까라고 생각한 것이 조각가를 목표로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미술연구소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지만, 곧 다치카와시에 있는 비행기 부품공장(히타치항공기주식회사의 다치카와공장 또는 다치카와비행기제작소)에 징용된다. 다음 해 가을, 공장을 도망쳐 귀국해 고향 함흥 주북에 있는 과수원에서 은둔하며 약 1년을 보낸다.

1945년(24세)

・두 여동생과 함께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다.

조선은행에서 근무하는 영숙과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에 진학한 경숙과 함께 서울 성북동에 있는 아버지의 지인댁에서 머물게 된다. 당시 권진규는 미술학교의 진학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11월에 혜화동에서 만난 중학교 친구 이란에게「 전부터 관심있었던 조각을 배우기 위해 일본의 미술학교에 갈 예정」이라고 말한다. 함흥에 남아 있던 부모도 1951년 초에 월남해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한 후, 1954년 5월에 서울시 종로구 사간동 9번지에 정착해 새로운 호적을 취득한다.

1947년(26세)

・속리산 법주사 대불 제작에 참가한다.

김복진(도쿄미술학교 조각과 졸업)의 유작인 속리산 법주사 대불을 윤효중(도쿄미술학교 조각과 졸업)이 이어받아 계속 진행하게 되면서 이 작업에 약 6개월간 참여한다.

・성북회화연구소에 들어가 미술을 배운다.

이쾌대(1938년3월,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 졸업)가 운영하는 성북회화연구소(1947년 9월~1950년 3월)의 연구원이 된다. 김숙진, 김서봉,임직순, 김창열, 심죽자, 이영은 등과 함께, 이쾌대가 제국미술학교시절에 배운 미술해부학과 예술론 등의 학과와 석고 데생(소묘)을 중심으로 한 실기를 배운다. 적확한 데생에 입각한 구조와 조형을 추구했던 이쾌대의 지도는 그대로 시미즈 다카시( 清水多嘉示)로 연결된다. 이 때 이쾌대에게서 들은 시미즈 다카시의 이야기가 무사시노미술학교 진학을 결심하게 된 동기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1948년(27세)

・형의 간병을 위해 일본에 밀항한다.

일본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야마가타현 사카타시의 대학부속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형 진원이 악성폐렴에 걸렸다는 연락을 받는다. 형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함흥에 있는 부모를 대신해 간호를 명목으로 일본에 밀항한다. 다음 해 봄에 형이 병사하지만, 권진규는 귀국하지 않고 도쿄에 머물며 사설미술연구소에서 공부를 계속한다.

1949년(28세)

・9월에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다.

입학 당시의 학적부에는「곤도 다케마사」이지만, 후에「권진규」로 변경한다. 당시 무사시노미술학교의 통상적인 입학 시험은 실기(목탄을 사용한 석고 사생), 논문, 구술시험이었지만, 후기 입학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시험을 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학과 시험은 없었다.

○ 이수관계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
  서양미술사
(이타가키 다카오)
60 서양미술사
(이타가키 다카오)
60        
  예술개론
(가타야마 도시히코)
60 미술철학
(가츠베 미타케)
55 미학
(이타가키 다카오)
65 철학개론
(무타이 리사쿠)
65
 

문화사
(나토리 다카시)

65

문화사
(나토리 다카시)

50        
  동양미술사
(긴바라 세고)
55 동양미술사
(긴바라 세고)
60        
  불어
(가와구치 히로시)
84 불어
(가와구치 히로시)
50 불어
(가와구치 히로시)
85    
      인체미학
(니시다 마사아끼)
65 교육학
(구라다 사부로)
80    
  조각실기
(시미즈 다카시)
84 조각실기
(시미즈 다카시)
80 조각실기
(시미즈 다카시)
81 조각실기
(시미즈 다카시)
80
              졸업제작 90
출석 89/103일 137/201일 65/88일(전기)  

 

당시 조각과의 학과과목은, 2학년까지 이수해야 할 필수과목은「 서양미술사」,「 동양미술사」,「 문화사」,「 인체미학」,「 불어」였으며, 3학년 이후에는「 미학」이었다. 권진규는 그 외에 선택과목으로「예술개론」,「 미술철학」,「 교육학」,「 철학개론」,「 불어」(3학년 과정)를 이수하였다. 실기과목은 데생과 인체 조각이 주이다. 실제로 1학년 시절의 3분의 2 를 석고 데생이 차지했다. 그 외, 동물데생, 정물유채, 인체데생은 조금 배우는 정도였다. 2학년부터는 인체조각이 주가 되어, 석고틀 제작을 포함한 점토소조를 중심으로 목조와 시멘트조각(소조) 등의 실습과 브론즈주조소의 견학 등이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2학년과정에서 인체조각 외에 릴리프부조, 동물조각 등도 배우게 된다. 3학년 역시 인체 조각을 주로 다루며, 석조,목조, 건칠, 테라코타, 시멘트조각(소조), 석고틀제작, 철재용접 등 다양한 조각 재료나 기법에 대한 수업도 받는다. 4학년에는 인체조각의 브론즈주조 등을 배우고 졸업작품 제작에 전념한다. 덧붙여 4학년에 배우는 브론즈주조의 수업은 학내가 아니라 주조소를 견학해 이루어 졌다. 이러한 당시의 교육과정으로 볼 때, 권진규의 작품에서 보이는 제작 기법의 대부분은 학교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습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석조와 테라코타는 후술한 바와 같이 권진규가 무사시노미술학교에서 처음 시작한 것으로 후배들에게 영향을 준 분야이다.

1950년(29세)

・2학년이 되며 조각을 시작한다.

소수의 학생으로 구성된 조각과는 2학년부터 연구생까지 같은 아틀리에를 이용하기 때문에 선후배의 정이 강했다. 시미즈 다카시교수는 매주 목요일 오전 3시간(모델, 포즈)을 직접 지도했으며, 가끔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점토 습작에 직접 헤라를 대기도 했다.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에는 모두가 얼마 정도의 돈을 걷어 모델을 구해서 종일 누드여인상을 습작했다. 모델의 포즈는 매회 다수결로 결정하였다.

1951년(30세)

・3학년이 되며 석조를 시작한다.

기치죠지( 吉祥寺)의 묘석가게에서 돌을 가져와 말을 제작한다. 당시의 기치죠지의 역전에는 화물을 운반하는 마차가 항상 왕래하고 있어 권진규는 그곳에 가서 말머리의 데생을 열심히 했다. 가끔 기치죠지에서 산 군고구마를 먹으면서 교정 한 쪽에서 석조를 제작했다. 당시 시미즈 다카시는 권진규가 석조를 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권진규는 석조에 관심이 많았다. 가타야마 도시히코(片山敏彦)에게 미켈란젤로나 로댕, 그리스 조각에 대해 배우고, 미쿠모 쇼노스케(三雲祥之助)에게 로댕의 제자인 샤를르 데스피오의 조각에 대해 배웠다. 덧붙여 미쿠모는 권진규의 석조를 보면서「 선이 좀 더 깊으면 안되는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권진규는 센나 히데오(仙名秀雄)에게「 인간을 위해서 인간의 조각을 만들고 싶기 때문에 유럽 특히 그리스에 가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권진규의 석조에 영향을 받아 석조의 전통이 없었던 무사시노미술학교에서 마키노 에이(牧野英), 도가시 하지메(富樫一), 아베 다카시(阿部忠) 등의 학우들도 석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여름, 센나 히데오와 함께 교토를 여행한다.

니시다 마사아키(西田正秋, 도쿄미술학교 교수, 인체미학 담당)의 소개로 지샤쿠잉(智積院)에서 2박을 하고, 후지이제성회유린관(藤井齊成會有鄰館)에 있는 중국의 석불을 견학한다. 이 때 권진규는 센나에게「돌을 갖고 싶다. 대륙의 돌을 갖고 싶다」라고 말한다.

・도모의 두상을 제작한다.

같은 아틀리에에서 실기 수업을 받으며 알게 된 서양화과 2학년 오기노 도모(荻野トモ)에게 모델을 의뢰해《도모》(석고, No.1 )를 제작한다. 그 후로도 도모를 모델로 한 작품을 몇 개 제작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둘의 교제가 시작된다.

1952년(31세)

・제37 회 이과전(9 월 1~19 일, 도쿄도미술관)에 석조《백주몽( 白晝夢)》을 출품해 입선한다. 당시 구니타치정 83-1 나카가와씨 집에 하숙한다.

・졸업작품으로 등신대의《나부》(석고, No.3 )을 제작한다.

1953년(32세)

・3월 20일,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한다.

졸업식 단체사진에는 권진규가 없지만, 오기쿠보의 요리집에서 열린 사은회에는 참가하였다. 졸업 후에도 연구과에 남아 1956년 3월까지 4년간 학교에서 작품 제작을 계속한다. 당시 연구과와 관련한 학생부 등의 자료는 현존하지 않지만, 규약에「연구과의 수학 기간은 일년 이상」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특별히 기간에 대한 기한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진규는 연구과를 수료한 후에도 학교에서 작품을 제작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권진규는 후배들의 희망이었다. 학우들은 조각과 예술에 대해 권진규와 나눈 대화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한 사람의 조각가로서 경의를 표했고 작품에서도 권진규의 영향을 받았다.

・제38회 이과전(9월 1~19일, 도쿄도미술관)에 석조《기사》 (No.5),《 마두A》,《 마두B》 (No.6)를 출품하고「 특대(特待)」를 수상한다.

당시 권진규는 무사시노시 기치죠지 2800 니시오쿠보씨 집의 좁은 방을 빌려서 하숙하고 있었지만, 생활고로 인해 그 곳을 나와 교제하고 있던 도모의 아파트에서 동거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조각 작업을 할 수 없었으므로 다시 네리마구 세끼마치 1-166의 다테노씨 집으로 이사하고, 작품 제작은 주로 학교에서 계속했다. 학부 졸업 후, 한국으로부터 송금이 끊어졌기 때문에 주로 도모의 아르바이트(미싱 재봉, 봉제) 비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서 나카노에 있는 클래식 전문 음악 다방에 다니며, 당시 한잔에 50엔 하는 커피(메밀국수와 같은 금액)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는 생활을 계속했다. 또한, 권진규의 궁핍한 생활을 지켜 보던 다나카 세이지 (田中誠治)이사장이《기사》,《마두B》,《뱀》(No.12) 을 사주어 그것으로 학비를 충당했다고 전한다.

1954년(33세)

・영화『 고질라의 역습』 (도호(東寶)영화사, 1955년 개봉) 촬영용 세트를 제작한다.

석고로 영화촬영용 세트를 제작하는 무사비(무사시노미술학교의 약칭) 그룹‘석고옥’ ( 도가시 하지메, 권진규, 아카오기 겐지(赤萩賢司), 아즈마 기쿠오(東喜久夫), 나리타 도오루(成田亨)) 으로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고질라의 역습』은 오사카 요도야바시(淀屋橋)가 무대로 권진규는 은행건물의 모형 제작을 담당했다. 2개월간 유치원으로 불리는 도호촬영소의 숙소에서 숙박하며 일했다.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면 모두 조각하는데 쓰겠다는 이야기를 서로 한다.

그 후로도『지에코초(智恵子抄)』 (도호영화사, 1957 년 개봉)에서는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郎)의 조각의 모작 10여점을 제작하는 등 도호, 다이에(大映), 쇼치쿠(松竹) 등 영화촬영소에서의 아르바이트는 1957년까지 계속 한다.

・제39회 이과전(9월 1~19일, 도쿄도미술관)에 석조《마두》,《 말》을 출품하고 두 점 모두 입선한다.

「 곤도 다케마사의 말을 다룬 작품에는 로마네스크의 조각을 보는 듯한 소박한 매력이 있다」라고 평가 받는다. 이 시기 권진규는 미타카시무레 447의 세이다이요(正大寮)에 거주했다. 덧붙여 서양화과 교수인 야마구치 죠난 (山口長男)은 이 해『 무사시노 미술』 14호(11월 1일 발행)에서 제39회 이과전에 출품한 권진규의 작품에 대해「 곤도 다케마사군은 아르카익하고 이질적인 표현력을 가진 사람으로, 고전적 조형에서 진실에 가깝게 표현하려고 하는 태도를 받은 형태가 아름답다. 더 한 걸음의 약진을 기대한다」라고 평가하였다.

1955년(34세)

・테라코타 제작을 시작한다.

여름, 일하는 도모를 도쿄에 남겨두고 혼자 니가타현 시바타에 있는 도모의 집을 방문한다. 머물며 점토로 작품을 제작한다. 도모의 집 근처에 있는 옷뽀지(乙法寺) 주변으로 기와를 굽는 가마가 많이 있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가마를 견학해 자신이 점토로 만든 마두와 우두(牛頭) 등을 직접 리어카로 옮겨 고온의 가마에서 굽는다. 테라코타에 대한 관심은 도쿄에 돌아와서도 계속되며 급기야 학교 내에 테라코타용 가마를 만든다. 이 시기의 작품은 대부분이 말이며 도모와의 방과 학교의 아틀리에에는 권진규의 말 작품이 다수 진열 돼 있었다.

・제40회 이과전(9월 1~19일, 도쿄도미술관)에 석조《마두A》 (No.13),《마두B》를 출품하고 2점 모두 입선한다.「 소박한 로마네스크 양식을 생각나게 하는 수법으로 목가적 정서를 나타내고 있다」라고 평가 받는다.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목조로 여인입상, 보살입상, 나부을 제작한다.

또, 사도(佐渡)에 사는 조각과 후배 우다 야스오(宇田靖夫)의 집도 방문한다. 권진규는 오후 8시가 넘어 밀짚 모자에 짚신 복장으로 연락도 없이 찾아가서, 해변에서 신문을 읽는 등 느긋한 시간을 몇 일 보내고 시바타로 돌아온다. 이 때 도모의 아버지로부터 돌아가신 처형( 도모의 어머니의 언니)을 위한 공양상의 제작을 의뢰받는다. 가까이에 있는 배밭에서 나무를 구해 야마가타의 온천에서 목조《여인입상》 (No.14) 을 제작한다. 이 작품은 후리아미술관소장《석조보살입상》 ( 중국, 7 세기)을 모본으로 하고 있지만, 얼굴이나 동그스름한 어깨는 돌아가신 분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후 자신의 작품으로《보살입상》 (No.15) 과《 나부》 (No.16)을 제작한다.

1956년(35세)

・9월 8일 오전 11시, 서울시 종로구 사간동 9번지에서 아버지 권정주가 급사한다.

아버지의 사인은 고혈압으로 인한 질환이었다. 어머니 조춘은 27일 사망신고서를 제출했으며, 권진규가 일본에 있었으므로 조춘이 호주가 되었다.

・10월,「 프랑스 국립부르델미술관제공 거장 부르델 조각 회화전」(10월 5일~11월 7일, 도쿄 브리지스톤미술관) 을 견학하다.

권진규는 그 동안 시미즈가 가지고 있던 책이나 사진, 소품 등을 통해 접했던 부르델의 작품을 이 곳에서 부르델의 조각 32점, 회화 30점을 직접 보게 된다.《 여자의 얼굴》 (그리스), 로댕의《서있는 포네스》 (석조), 부르델의《페네로프》 (브론즈)의 엽서를 구입한다. 또, 11월에 출판된 시미즈 다카시 편저『부르델 조각 작품집』(치쿠마 서방)을 구입해 평생 소중히 간직한다.

1957년(36세)

・NOVA 마네킹사에서 마네킹 제작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이 일은 1959년 귀국때까지 한다.

이는 이과회(二科會)에서 일양회(一陽會)로 출품 단체를 변경해 준다면 먹고 살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는 다카오카 도쿠타로 (高岡徳太郎)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도모도 마네킹의 얼굴 등을 그리며 자주 마네킹 제작을 도왔다. 한편 권진규는 마네킹의 틀을 이용해 건칠도 연습했다. 당시 둘의 생활은 꽤 궁핍했으므로 식사는 거의 자취로 해결했고 빨래대야에 새우젓갈과 말린 무우 등을 넣고 김치를 만들어 먹곤 했다.

1958년(37세)

・봄, 우다 야스오의 졸업작품 석고《나부》를 촬영한다.

권진규는 후배 우다의 졸업작품 석고《나부》를 현관 밖에 있는 소나무 아래로 옮겨 사진을 찍는다. 평소 권진규를 동경하던 우다는 자신의 작품을 졸업할 때까지 그대로 둔다.

・제4회 일양회 미술전람회(9월 22일~10월 10일, 도쿄도미술관) 에《나부》,《 두상(테라코타)》 (No.20),《 두상(테라코타)》,《 석마(石馬)》,《 석마》의 5점을 출품하고 일양상을 수상하며 회우(會友)로 추천된다.

입선 작품에 대해「 석조로 된 두상은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는 듯 하며 말을 걸어 올 것 같습니다」라고 평가 받는다. 당시 네리마구 미나미마치3-843에 거주한다. 또,『 무사시노 미술』창립 30주년 기념 특집호 (12월 1일 발행)에서는《 두상》(No.20)을 다루며「 조각과를 졸업한 곤도는 그동안 이과전에서도 수상했지만, 올 해 일양회에서도 수상했고 회우로 추천되었다」고 우수한 졸업생으로 소개하였다.

1959년(38세)

・6월, 고노 구니오( 河野国夫)의 『무대 장치의 일』( 미래사 )을 구입 한다.

・여름, 어머니과의 생활을 위해 귀국을 결정한다.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통지를 받자 권진규는 귀국을 결심한다. 형과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나 어머니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자신이 장남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아직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 도모와 함께 귀국하는 것은 곤란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생활이 안정되면 도모를 부르겠다고 하며 8월 6일에 네리마(練馬)구청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한다.

・9월, 하네다 공항에서 홀로 귀국한다.

형 진원의 유골을 가지고 귀국한다. 일본에서 제작한 작품은 배를 통해 부산으로 보냈지만 파손된 작품이 많았다. 가정의 경제 상황의 악화로 성북구 동선동3-250으로 이사해 어머니와 함께 산다. 대형 기념상을 제작하기 위해 지붕을 높게 올리고, 테라코타 작품을 구울 수 있는 가마를 만드는 등 자신이 원하는 아틀리에를 2년에 걸쳐 1962년에 완성한다. 하네다공항에서 마지막으로 함께 찍은 도모와의 사진을 포함해 일본에서 가져온 도모의 사진 3장과 도모의 자화상(유화)을 아틀리에 중앙에 둔다.

・10월 27일, 한국 호적을 취득하고 호주를 상속한다.

당시 권진규는 하루를 아침(6~8시), 오전(10~13시), 오후(15~18시), 밤(20~22시)으로 나누어 작품을 제작했으며, 아침과 밤에는 주로 구상과 드로잉을 하고 오전과 오후에는 작품 제작에 주력하였다. 1970 년대에 들어서면 밤 작업은 거의 하지 않고, 해지기 전에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일찍 잠자리에 들고 새벽 4시에 기상하는 생활을 한다. 기상 후, 먼저 블랙 커피와 담배를 피우며 라디오나 음악을 들으며 작업하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다. 이러한 생활패턴으로 인해 간혹 근처 주민들에게「 저 집에 귀신이 살고 있다」고 들은 적도 있었다.

1960년(39세)

・4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비상근 강사로서 근무한다(1973년 5월 3일 사망으로 해고).

3학년의 선택 과목「조소」( 주 3시간)을 맡는다. 실기실에서 점토를 가지고 자신의 얼굴이나 다리 등을 자유롭게 만드는 수업이지만, 초보 학생에게는 비너스나 아그립파 등의 석고상을 모작하게 하고 어느 정도 공부한 학생에게는 반추상 등을 선택하도록 한다. 1970년대에는 2학년에게 자재화(데생)나 판화도 가르친다.

1961년(40세)

・권옥연이 프랑스에서 귀국한다.

1957년부터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던 친척 권옥연이 귀국한다. 이후 둘의 교류가 시작된다.

・영화사관계의 일로 알게 된 전화교환원과 재혼했으나 곧 이혼한다.

・7월 7일~11월 30일, 남대문 수리(1961년 7월~1963년 3월)에 제도사로 참여한다.

비상근 강사로 근무하고 있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김정수 교수( 서울시 문화재 보존 위원) 의 추천으로 참여하게 된다. 1962년 2월 14일에는 경복궁과 남대문의 조각을 촬영하고 스케치했다. 특히, 처마의 잡상 이나 나무 조판, 공포 등에 관심을 갖고 있던 것 같다. 이 후로도 고궁과남대문을 자주 견학한다. 남대문 수리에 참가하여, 전통목조건물을 자세하게 본 경험은 그 후, 잡상을 제작하였으며, 공포 또는 성문 등의 테라코타 부조 작품을 제작하는 계기가 된다(No.36・37).

1962년(41세)

・1월, 연하장 뒷면에 나부를 스케치한다.

・2월, 진해를 방문한다.

조선시대의 수군을 재현하는 이벤트들에 참관해 사진을 찍고 깃발의 문양 등을 디자인한다. 이는 영화제작관계의 일을 하고 있는 매제 허욱인을 도와 영화 촬영 도구를 제작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그 후에도 수 년간 정릉의 동생집에 설치된 스튜디오에서「 이순신」과 한국고전소설「흥부와 놀부」,「 콩쥐 팥쥐」 등 을 인형이나 소품으로 촬영하는 인형극 영화촬영에 참가해 배경, 인형, 디자인 등을 담당한다.

・여름, 여동생 권경숙을 위해《십장생》을 제작한다.

아틀리에를 완성한 후, 지난 해 봄에 여동생 부부가 정릉에 지은 집의 거실에 벽화《십장생》을 제작한다.

1963년(42세)

・1963년, 덕성여자대학 의상과와 생활미술과에 조교수로 취임한다(대학의 기록에 의거한 내용이다).

또, 1964년과 1965년에는 의상과 강사로서 미술을 담당한 취지가 대학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학에 의상과를 설치할 즈음 문교부 인가를 위해서「도쿄미술대학 석사」라고 권진규의 학력이 이용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3년간 비상근 강사와 같은 취급을 받으며 데생 실기를 가르친다.

・영희가 권진규의 집으로 들어오다.

이 해, 어머니는 강원도 춘천출신의 박영희(11 세)를 데려와 함께 살게 된다. 권진규는 영희를 모델로 한 작품(No.23)을 몇 점 제작하였다. 영희는 1970년까지 가사를 도우며 권진규를 돌보고 작품 제작을 돕는다.

・5월, 오노 가츠토시(小野勝年)의『 고구려의 벽화』(平凡社,1957년)에 수록되어 있는 무용총의 주작도를 참고로 테라코타《해신》 (No.21)을 제작한다.

・8월 11일, 작년 10월3일에『동아일보』에 소개된 속리산 법주사의 기사를 상기하여, 일본유학하기 전에 참가한 대불을 보기 위해 법주사를 방문한다.

・테라코타《고양이》를 제작한다.

집 에서 기르고 있던 고양이를 촬영해 드로잉(No.D22)하고 테라코타 작품(No.22, 24)을 제작한다. 권진규는 함흥에서도 고양이를 길렀다. 1965년경에도 여동생 경숙에게 받은 폭스테리아‘ 데뷰’를 2년간 기르며 드로잉(No.D28)을 남기는 등 동물을 좋아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동물들을 관찰하며 작품의 모티프로 하곤 했다.

1964년(43세)

・1월 23일, 폴 세잔느의《욕녀(浴女)》를 모사한다. 이 외, 서양 모더니즘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스케치를 그린다.

・2월말, 시라카와이시(白河石, 일본의 시라카와이시의 안산암)를 이용한「석조, 마두 2분의 1개, 잡상 한 점, 성」을 제작한다. 또, 고향을 그리워하며「내일, 음력 정월대보름 날, 고향 함흥에서는 만세교에서 다리밝기 하는 날이다」라고 스케치북에 쓴다.

・7월 18일,《 목신(牧神)》을《 뱃사람(舟人)》으로 고쳐 만든다.

권진규는「 《목신》은 아무 내용이 없다. 이 작품 제작의 계속은 무의미하다. 이 작품을 바탕으로 손을 드는 뱃사람으로 개작」한다고 했다. 또, 이 때 낙랑의 귀면이나 고궁 평면도 등의 스케치를 한다.

・7월 20일, 테라코타 부조의 구상을 시작한다.

가네다 다츠히로(金田辰弘)의《무거운 날개(重い翼)》 (1961년, 목판·유화) 등을 참고하여 테라코타 부조의 제작을 시작한다. 새를 모티프로 한 작품을 1965년에, 새에게 꽃을 더한 작품(No.41, 42, 43)을 1966년에 발표한다.

・7월 27일, 멕시코의「 사포텍문화의 미토라궁전 벽화」,「초기기쿠테라스문화의 귀단지 케레노스의 파편」등의 스케치를 작성한다.

권진규는 이러한 벽화나 항아리의 단편에 묘사된 회화에 대해서「 마야 문화, 고구려(지금의 중국 동북지방)의 벽화와 유사한 점(공통점) 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글을 남겼다.

・7월 28일~8월 2일, 테라코타 부조《뱃사람》을 제작한다.

권진규는 우이동 계곡에서 목욕하면서 부르델의『 Rodin』(시미즈 다카시, 세키 요시(関義)번역, 치쿠마서방(筑摩書房), 1956년12월) 을 모두 읽고 집에 돌아와 테라코타 부조《뱃사람》의 테라코타용 형틀을 만들고, 8월 2일 가마에 굽는다. 다음날, 가마를 크게 개축한다.

・8월 6일, 테라코타 부조《악사(樂士)》를 재완성한다.

《 악사》 (No.27)는 부르델의《 아폴론의 명상과 달려오는 뮤즈들》 (샹제리제극장 정면 장식 릴리프)을 참고해 제작한 것이다. 이 테라코타 부조를 다시 구워 흑색으로 완성한다.

・8월 7일, 덕수궁박물관을 참관하고『국립박물관 안내』를 구입한다.

・8월 11일, 테라코타 부조《곡마단(Cirque)》의 드로잉을 작성한다.

・12월, 목조《입산( 入山)》을 구상하고 제작한다.

1965년(44세)

・2월 13일~3월 3일,《 Circus》,《 Comedie》를 제작한다.

권진규는 먼저 2월 13일에《 Circus》를 조각판에서 분리해 햇볕에 건조시킨다. 3월 1일 아침,「 에트르스크의 늑대의 유방과 같이 둥글지도 않고 각지지도 않은 단단하게 흉판에 들러붙은 그 브론즈색의 유방, 자신의 작품도 그렇게 표현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메모를 붙이고 《Comedie》에 벵갈라와 백토(흰색 시멘트)의 혼합물을 발라 최종 건조시킨다. 착색에 있어 《Circus》에는 백색 시멘트만을 도포하는데 반해《 Comedie》에는 반건조되었을 때 백색 시멘트를 바른 후 더 건조시킨 후에 FeO(산화철)와 백색 시멘트를 1: 10의 비율로 배합한 것을 다시 위에 도포했다. 2일, 이 두 작품을 가마에 넣고 고온에서 굽는다. 3일, 두 작품을 가마에서 꺼내고,《 Comedie》의 우측 인물 상반신을 보수했다. 4일, 오전 10시~ 오후 2시에, 도선사에 등산한다.

・4월 20일, 일본에 있는 오기노 도모와 협의 이혼한다.

귀국 후, 6년이 지나도 연락이 없자 도모의 부모님은 이혼서류를 송부한다. 얼마 후, 권진규가 서류에 날인해 반송하므로 해서 합의 이혼이 성립된다. 그 후, 도모는 가사이 세고( 河西成吾)와 재혼한다.

・6월 이후, 테라코타 부조를 중심으로 계속 제작한다.

・7월 12일, 어머니가 뇌혈전으로 병상에 눕게 된다.

・조각 작품을 제작하게 된 동기에 대한 자신의 글을 잡지에 게재한다.

잡지에 게재된「일본에서 조각을 연구한 권진규씨」라고 제목을 붙인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자기의 천직을 발견한다는 것은 거의 간단한 동기에 의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히비야공회당 음악홀에서 뮤즈에 사로잡혔을 때, 문득 음을 양감으로 바꾸어 표현할 수 없을까하는 생각이 미친 그 후 줄곧 그 길을 걸어온 지 벌써 20년이 되었다. 미술 학교 시절, 돌을 쪼고 있을 때다. 일본의 조각가들이 너는 틀림없이 신라의 후손이구나 하는 말에 약간 불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귀국해서 그 사실을 알았다. 우리 동포들은 돌에 대해서 어떠한 天分을 갖고 있는 것을 느꼈다. 축대를 쌓고 있는 이름없는 석공의 그 솜씨는 석굴암의 그 거장들에 통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 아직은 예술가라고 큰 소리를 칠 계제는 못된다. 그렇지만 역시 나는 철저한 쟁이 기질로 나갈 뿐이다」

라고 권진규는 왜 조각을 하게 되었는지와 석조에 대해서 밝혔다.

・9월 1~10일, 신문회관에서「 권진규조각전 SCULPTURE terra cotta」 을 개최한다.

이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은《두상》 (No.20),《 Oiseoux》,《 마두》, 《희구( 希求)》,《 해신( 海神)》 (No.21),《 손》,《 우두( 牛頭)》,《 나부》, 《태( 胎)》,《 Chat noir》 (No.22),《 도모》,《 재회》,《 영희》 (No.23), 《Dance》,《 뱃사람( 舟人, Boat man)》,《 말》,《기수》등의 테라코타와, 《악사》 (No.27),《 SPRING》 (No.29),《 Circus》,《 Comedie》,《 춤 추는 뱃사람(舟人舞)》 (No.30),《 Horseman》,《 Dynasty》 (No.31),《화가와 모델》등의 테라코타 부조, 브론즈의《청년》 (No.8), 석고의《조국》, 목조의《입문(入門, 入山)》등으로 모두 45점이다. 덧붙여,《 조국》은 로댕의《피에르 두 위살》과 유사한 등신대의 석고 남자입상 작품으로 시장에서 지겟짐을 나르는 남성을 모델로 하였다.

이 전람회는 한국에서 처음 개최되는 조각개인전이었으며, 김수석과 이경문이 운영하는 수화랑이 경비를 부담해 개최하는 화랑초대전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에서의 첫 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람회의 평판은 지극히 차가웠다. 예술의 축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기고 있던 시기로 추상 조각이나 새로운 재료의 실험적인 신미술 도입이 시작된 당시의 미술계에 있어 그의 작품은 근대 조각의 전통에 매달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로 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전시기간 중에 권옥연이 신문연구소 연구원인 유준상을 소개한다.

・이선자가 권진규의 아틀리에에서 조각을 배우다.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의 이선자는 권진규의 개인전을 보고 감동해, 권진규에게서 조각을 배우며 석고 자소상을 제작한다. 또, 권진규의 모델도 하여,《 선자》 (No.40, 44, 60)등 1966년에 제작된 작품이 많다. 이선자가 아틀리에에서 권진규의 지도를 받으며 그녀의 자소상(1966년, 석고),《 소》(1966년, 테라코타) 등을 제작한다. 그 후, 권진규는 이선자가 아틀리에에 남겨 둔《 소》의 석고틀을 이용하여 테라코타(No.46)와 건칠을 제작하여 1971년 명동화랑에 출품한다. 이 때에 이선자의 고등학교 동문(경기여고 47회)인 남명자(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바이올린전공졸업, KBS오케스트라 단원), 강애자, 최명자(이화여자대학교 기악과 콘트라베이스 전공 졸업)등이 자주 놀러와서, 권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남명자를 모델로 한《명자》(1966년, 테라코타, No.38)를 제작하고, 명자의 부탁을 듣고 브론즈(No.39)도 만들어 준다. 또 강애자를 모델로《애자》 (No.55, 56), 최명자를 모델로 한 두상《명자》(1966 년, 테라코타)을 제작한다. 테라코타 작품들은 1968년의 니혼바시화랑의 전시에 출품한다.

・『미술수첩』 (1961년 12월호) 에 특집으로 실린 쟈코메티의 작품 중《병 (壜)》 (1953 년, 유채) 을 모본으로 스케치와 유화를 제작한다.

・수화랑의 의뢰로 귀면기와, 용등, 스탠드, 토기 등을 제작한다.

1966년(45세)

・3월,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조각과에 비상근 강사로「 조각」을 가르친다 (1968년도까지) .

조각과 3, 4학년에게「 조각」을, 서양화과와 공예과의 학생에게는 교양실기로「 조소」를 가르친다. 권진규는 학생들에게 조각을 가르치면서「 서구의 조각은 그들 집단의 골수에 뿌리박은 전반적인 사상, 생활감정, 전통에서 집약된 것이다. 그들의 새로운 조형이념은 그 거대한 전통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다. 우리들이 아무런 내면의 충격에 의하지 않고 안이하게 그들이 지향한 예술흐름 속에서 우리의 예술행위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들의 뒤만 쫓는 자기상실자가 되고 말 것이다」라고 말하며 정신에 근거한 조형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말하였다(1966년 조각과 학생으로서 권진규에게 조각을 배운 김광진의 증언. 김광진의 홍익대학 교석사논문『권진규 조형세계 고찰』, 1977년11월, p.21).

・7월 24일 오전2시, 어머니 조춘이 사망한다. 8월 11일, 권진규가 사망 신고서를 제출한다.

・10월, 건칠제작을 생각한 듯, 일본에 있는 이선자의 오빠에게 재료를 부탁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으나,《 명자》의 건칠을 만들어 보는 등, 건칠제작의 실험을 시작한 것 같다. 건칠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1970년경이다.

・10월12일, 이선자가 미국 유학을 가는데, 권진규는 유준상, 남명자와 함께 김포공항에서 배웅한다.

1967년(46세)

・4월,『 서울 남대문 수리보고서』 (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1966년 2월) 를 참고로 데생을 한다.

・《아기를 안은 비너스(Venus with Child)》를 제작한다.

이 작품은 권진규가 밖에서 본 임산부에서 착상해서 제작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는 고대 슈메르 조각의 영향이 엿보인다.

・8월 7~10일, 황모( 서울대학교 건축과 졸업) 와 강원도 설악산, 강릉, 동해 등을 여행한다. 또, 8월 29일에는 인천 작약도를 다녀온다.

・가을, 신세계백화점 전시장에서 유준상의 소개로 서라벌예술대학생 이순아를 알게 된다. 이 때, 권진규가 이순아에게 건넨 명함에는「테라코타 권진규」라고 되어 있었다. 권진규의 의뢰로 이순아는 모델을 하게
된다.

・일본에서의 개인전 개최가 정해져 새로운 작품 제작에 들어간다.

2년 전 신문회관에서 개최된 권진규의 개인전(1965년, 서울) 이 생각만큼 평가를 얻지 못한 것에 비해, 같은 해 니혼바시화랑(1965년, 도쿄) 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서양화가 권옥연은 호평을 받았다. 권옥연은 조각전을 개최하고 싶다는 니혼바시 화랑의 사장 고지마 데츠로(兒島徹郞)에게 권진규를 추천한다. 고지마는 한국에 와서 권진규 아틀리에를 방문해 다음 해로 권진규의 개인전 개최를 약속한다.

이것에 고무된 권진규는 더욱 정열적으로 작품 제작에 몰두한다. 1965년의 개인전 이래 알게 된 유준상과 미학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유준상은「 예술은 간접적이라고는 하나, 인간 경험의 반영으로 모딜리아니의 초상은 그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이었다」라고「만남의 미학」을 말한다. 또한, 나혜정 등의 연극 지망자나 신문회관 직원의 여성들을 권진규에게 모델로 소개한다. 권진규는 홍익대학교에서 알게 된 서양화과의 장지원과 공예과의 최경자, 오형자 등을 모델로 한《志媛의 얼굴》 (No.53, 54),《 경자》등을 제작한다.

・12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여러 가지 포즈의 테라코타 나부상을 제작한다.

1968년(47세)

・2월, 앙리 베르네유(Henri Verneuil) 감독, 앤소니 퀸(Anthony Quinn) 주연의 영화「 25시」(1967년, 이탈리아)를 감상한다. 이 영화를 장지원과 2월 15일에 보고, 최경자와 18일에 또 본다.

・2월,《 땋은 머리》,《 현옥》을 제작한다.

《 땋은 머리》 (No.67, 68)는 박영희를 모델로 했으며,《 현옥》 (No.69)은 서라벌예술대학 회화과 김현옥을 모델로 한 흉상이다. 김현옥은 1967년 가을에 유준상의 소개로 알게 되었으며 1970년 말까지 권진규의 아틀리에를 드나든다.

・4월,《 혜정》을 제작한다.

3월 9일 유준상의 소개로 서울연극학교(현재의 서울예술대학)에서 연극을 배우는 나혜정을 알게 된다. 다음달 나혜정을 모델로《혜정》 (No.70)을 완성한다.

・7월 11일~20일, 도쿄 니혼바시 화랑에서「권진규조각전(테라코타)」 을 개최한다.

테라코타 30점으로 구성되었으며 출품작은 아래와 같다.

《 강원의 여인》,《 비구상》,《 재회》 (No.50),《 춘엽니》 (No.51),《 목욕 하는 여인》,《 志媛의 얼굴》(No.53),《 애자》 (No.55),《 휴식》(No.64), 《곤스케》 (No.58),《 선자》 (No.60),《 두상》 (No.20),《 봉숙》,《 목욕 후》,《 포즈》 (No.62),《 단지의 여인》,《 아침》,《 낮》,《 싫어》 (No.65), 《그 후》,《 이튿날 아침》,《 땋은 머리》 (No.67),《 혜정》 (No.70),《 영희》 (No.23),《 말》,《 명자》(No.38),《 청호동의 여인》,《 서강의 여인》,《 연실의 머리》,《 시녀》(No.71),《 댄스》

전람회는 대체로 높은 평가를 받고,『 도쿄신문(』7월19일 석간),『요미우리신문』(7월18일) 등에 소개된다. 『 도쿄신문』은「 근대적 구상조각의 재미 권진규 조각전」이란 제목으로

「 권진규는 1922년에 태어나, 전쟁 후, 무사시노미대에서 조각을 배우고 20년간 일본에 체재하였고 최근 10년간은 귀국하여 서울에 체제하고 있는 한국 작가이다. 소품의 전신나부상군과 흉상 20점의 합계 30점을 전시하였다. 전신상은 이 작가의 공부의 폭이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부르델이나 마이요르, 이집트 조각, 타나그라 조각 등을 흡수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이들 전신상은 개성적 집중력이 약하고 포즈의 표정에 의지하고 있는 약점이 보이긴 하지만, 흉상 작품군에서는 독자적인 것을 표현하기 시작하고 있어 흥미롭다.

가슴에서 목까지의 형태를 삼각추의 양괴(量塊)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이탈리아의 현대조각가 자코모 만주(Giacomo Manzu)를 연상시키지만, 물체의 안정감이나 크기는 잘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연속되는 얼굴은 불필요한 살을 깍아 내어 갸름하게 표현하였다. 표면적인 세밀함을 추구하지 않고 크고 무게 있는 안정감을 표현한 조각성이 엿보인다. 여기에서 일본인의 감성과는 다른 풍토성을 느낄 수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요소 요소에서는 날카로운 감각이 배어 있으며 근대적인 구상조각의 재미를 지니고 있다.

머리카락이 없는 작품《( 춘엽니》 등)이나 스카프로 머리를 감싼 작품 《( 지원》,《 애자》 등)은 작품으로서는 완성된 느낌을 주지만, 욕심을 낸다면《 시녀》와 같이 머리카락을 제대로 파악하여 목과 가슴이 이루는 삼각추 형태와 어떻게 결합 하는가를 발전시켰다면 한 층 복잡하고 재미 있는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라고 가능성을 포함한 평가를 한다.

『 요미우리신문』은「 강인한 리얼리즘」이라 평하고,

「 최근에는 현대조각이라고 하면 추상조각에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국제적인 동향에 민감히 반응하는 것이 일본인의 특징이다. 조각계도 전반적으로는 디자인에 근접하여 종래의 양감을 적용시킨 구상조각 등, 이미 구시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상조각 중에 뛰어난 작품이 있어도 좋을 것이다. 표면적인 사실을 넘어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 잡는 작품이 존재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특히, 실력있는 구상조각를 기대하고 있는 작금에 있어서, 그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 것이 10일까지 니혼바시화랑에서 열리는 권진규 조각전이다.

테라코타 작품 30점. 전신상이나 말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약 10점의 흉상이 주목할만 하다.《 지원》,《 춘엽니》,《 애자》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두 모델을 두고 제작한 것인데, 단순한 초상만으로 끝나지 않고 있다. 불필요한 살을 최대한 깍아내고 요약할 수 있는 포름을 최대한 단순화하여 극한까지 추구한 얼굴 안에 무서울 정도의 긴장감이 창조되어 있다. 중세 이전의 종교상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극적 감정의 고양이 느껴진다.

이들 작품을 보면, 목에서 허리에 걸쳐 확인되는 요약된 형태에서는 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조각가 자코모 만주와 닮은 면을 볼 수 있다. 또한, 둥그스름한 머리나 높은 코, 크게 뜬 눈에서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을 구축한 수메르인들의 원초적 초상조각과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럽의 영향이 있다하더라도, 구운 흙 속에 대지의 생명이 지닌 솔직함이나 순박함과 함께 강인함을 불어 넣으려고 하는 작자의 조형 자세와 풍토는 분명히 동양 바로 그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자는 1922년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전쟁 중에 일본에 건너와 종전후 무사시노미대 조각과를 졸업했다. 1959년에 귀국하여 지금은 서울의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조각과 교수라고 한다. 어쨌든, 이들 초상조각에 보이는 강인한 리얼리즘은 구상조각
이 빈곤한 현대 일본 조각계에 하나의 자극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라고 높게 평가한다.

출품한 작품 가운데《애자》(No.55)와《춘엽니》(No.51)는 도쿄 국립 근대미술관에 기증한다. 이 전람회의 팜플렛에는 스승 시미즈 다카시와 조각가 기노우치 요시(木内克), 미술평론가 혼마 마사요시(本間正義)의 글이 실려 있다.

・니혼바시화랑에서 도모와 재회한다.

권진규는 일본을 떠난 후 도모와 전혀 연락을 하지 않았다. 마키노에이(牧野英, C.S.YUN )에게 도모의 소식을 물어 본다. 그 연락이 곤야스코(昆保子)를 통해 도모가 알게 되면서 전람회 첫날 도모는 니혼바시화랑으로 찾아온다. 권진규를 보자 마자 그를 향해「 바보」라며 소리내어 우는 도모에게 이미 재혼한 것을 안 권진규는 어떤 감정표현도 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권옥연이 그대로 둘 수 없어 둘을 근처에 있는 초밥집으로 데리고 나간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권진규는 아무 말 없이 내내 있는다.

7월 20일, 전람회를 마치고 2주간 학교 후배 아카오기 겐지(赤荻賢司)의 집에서 머문다. 권진규는 도모가 자신을 기다려 줄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한국에 함께 돌아가려고 했던 듯 하다.「 여자는 원래 그렇게 차가운가」라며 맥주를 마시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카오기의 집에 머무르면서《여인두상》(No.72, 73) 등, 팔린 작품의 수 만큼을 시멘트로 제작하여, 귀국할 때 통관에 필요한 준비를 한다. 그 중 하나를 아카오키 아틀리에에 남겨두고 귀국한다.

・7월 30일, 시미즈 다카시를 방문한다.

전람회도 무사히 마치고, 그런대로 괜찮은 평가를 받은 권진규는 답례를 겸해 은사인 시미즈 다카시와 무사시노미술대학의 다나카 세지(田中誠治)이사장을 찾아 뵙는다. 체재비와 제작비의 목표가 섰기 때문에(니혼바시화랑 제공), 일본으로 돌아와 작품제작을 계속하고 싶다는 바램을 전한다.

이 때 무사시노미술대학은 이미 야스다 하루히코(保田春彦)의 전임강사 부임이 결정되었으며, 비상근강사의 후임 인사가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다. 이사장과의 면담 중에 인사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으며, 권진규는 자신을 비상근 강사로 초청해 주기를 기대한 것으로 여겨진다.

・8월 6~7일, 고미술연구여행(나라, 교토)에 참가한다.

나라공원 사루사와이케(猿澤池)옆의 다이몬지(大文字)여관에서 숙박하고, 나라의 호류지(法隆寺)나 고후쿠지(興福寺), 도다이지(東大寺) 등을 버스로 돌며 우지(宇治)의 뵤도잉(平等院)을 견학한다. 도쿄로 돌아온 후 귀국한다.

・8월 29일~9월 14일, 최홍자를 모델로《홍자》를 제작한다.

・9월 17일~28일, 홍익대학 공예과 출신의 최경자를 모델로《경자(bust Choi)》를 제작한다.

・9월 25일~10월 12일, 신인소설가 신예선을 모델로《예선》 (No.76)을 제작한다.

・10월 17일~11월 7일, 홍익대학교 조각과의 안희정을 모델로《 희정》 (No.77)을 제작한다.

・11월 12일~12월 3일, 서라벌예술대학 회화과의 이순아를 모델로《순아》를 제작한다.

7월 니혼바시화랑의 전람회에서 얻은 자신감과 도일에 대한 희망으로 어느 때보다 정열적으로 제작에 임한다. 주로 테라코타 여성 흉상이 많이 제작된다.

・10월 24일, 니혼바시화랑의 고지마 데츠로가 한국에 와 권진규의 도일 계획에 대해 걱정하며 귀국한다.

・11월 12일, 시미즈교수에게 서신을 보낸다.

 

「시미즈 선생님께

전략. 초겨울에 문안 올립니다

덕분으로 도쿄의 개인전도 무사히 정리하고 지금은 그것을 돌아보며 다음 작업에 착수하고 있습니다. 이번 개인전의 성과는 모두 지금의 저를 길러주신 선생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엄격한「 자연의 구조」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파묻힌 10년간 생각보다는 시각적으로 주변이 시끄럽지 않은 곳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유일한 지주로 삼으며 자신을 철저하게
분석해 갈 수 있었던 덕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게 종종 찾아가서 더 지도를 받고 싶으나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가깝고도 먼 벽이 있어서 입니다만, 이 벽을 밀어 열 수 있도록 무사시노미술학교로의 소생의 초청을 원했습니다만, 이 일에 대해서는 다나카 이사장님도 양해가 끝난 상태입니다만, 사무적인 것만이 남아 있다고 상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말 니혼바시화랑의 고지마 데츠로씨도 이곳에 와 몹시 걱정하고 가셔서 매우 송구합니다만, 한마디만 학교에 push 해 주셨으면 하고 예의를 생각하지도 않고 부탁드립니다. 선생님의 언제까지나 건승을 기원드리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11월 12일 권진규(곤도) 올림

추신. 졸작의 모교 기증 건은 테라코타이기에 취급하는데 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 다음 기회에 소생이 가지고 가고 싶습니다」

 

이 편지로서 당시 권진규가 무사시노미술대학 비상근 강사로 임용되고자 시미즈 교수의 원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학이 다카노다이(鷹の臺)캠퍼스로 모든 학과가 이동하는 상황에서, 전학년 통합에 따른 학생자치회와 대학측과의 의견차가 10월이 되면서 더욱 깊어지게 되고, 급기야 다음 해에 대학 휴교, 봉쇄 조치가 내려지기에 이른다. 이것으로 인해 권진규의 비상근 강사 채용은 보류된다.

・12월, 주작이나 쌍용 등의 문양, 장식판, 불두, 귀면기와, 토기 등의 디자인을 많이 다루며 제작한다.

1969년(48세)

・5월 18~31일, 테라코타《오줌싸개소년》과《 등롱》을 제작한다.

・테라코타《말》 (No.79)를 제작한다.

이《말》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동쪽 페디먼트(박공벽)의 마두(세레네의 말)를 본뜬 석고상(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 아틀리에에도 있었다)을 모델로 제작한 것이다. 대학시절의 기억과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소년 미술관 속편Ⅱ 그리스」(이와나미서점( 岩波書店), 1952년 10월) 의 도판을 참고로 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12월, 데라코타 흉상《소춘》을 제작한다.

11월, 김현옥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참가한 권진규는 그곳에서 김소춘(서라벌예술대학 동양화) 과 알게 되며 그녀에게 모델을 부탁한다. 12월초 첫눈 내리는 날부터 테라코타《소춘》의 제작에 들어간다. 김소춘은 권이나(권옥연의 딸)와 함께 권진규에게 조각을 배우면서,《그리스도의 십자가(Crucifixion)》 (1970년) 등의 건칠 제작을 돕는다.

1970년(49세)

・이 해, 건칠《그리스도의 십자가(Crucifixion)》를 제작한다.

본래 이 작품은 근처에 있는 교회의 의뢰로 제작된 것이지만, 완성후 기묘한 형태에 곤혹스러워하며 교회측이 받지 않아 아틀리에 벽에 계속 걸린 채로 있게 된다. 권진규는 다음 해에 개최되는 명동화랑 전람회에 이 작품을 출품한다.

・화목한 가족을 희망하며 이화여자대학 영문과출신 여성과 재혼하지만, 곧 헤어진다.

・5월, 갤러리비함에서 개최된「비함전」(5월 22~26일)을 방문해 김비함의 작품을 보고 온다.

・권경숙가족과의 동거가 시작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가사와 제작을 도와 온 박영희가 집을 나가게 된다. 이 때, 권진규는 영희에게 금반지( 김소춘이 생일을 축하하며 권진규에게 준 것) 를 이별의 선물로 건넨다. 그 후, 여동생 권경숙가족이 들어와 함께 지내게 된다.

・늦은 여름, 원수영, 서성만과 함께 부산 송정 해수욕장, 부산항, 범어사, 통도사, 해인사 등을 여행한다.

・12 월, 춘천고등보통학교(춘천공립중학교)15 회 동우회보『예맥』2호에「 무제」를 게재한다.『 예맥』의 표지그림은 신라 토기를 기본으로 한 권진규의 디자인이다.

1971년(50세)

・2월 28일~3월 29일, 양산 통도사 수도암에서 목조불상 제작에 전념한다.

3월 7일에는《불상》 (No.91)을 거의 완성한다. 이《불상》의 구상과 제작에 있어서 권진규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금동보살반가사유상》 (삼국시대)의 머리 부분과《철조여래좌상》 (고려 초기)의 몸 부분을 참고로 했다. 또, 후리아미술관소장《석조보살입상》( 중국, 7세기) 을 참고로 한《보살입상》을 만들 준비를 한다. 제작 중 필요한 도판이나 이런 저런 사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조카 허명회에게 편지를 보냈다. 또, 이혜상이 준비한 목재(적송)를 사용해《 우두(牛頭)》 (No.92) 를 조각한다.

・귀가 후,《 불상》을 테라코타(No.94)와 건칠로 제작한다.

여동생 경숙에게 「나의 마음이 평온할 때는 불상이 미소짓고 있지만, 나의 마음이 우울할 때는 불상도 울고 있다」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한다. 또, 테라코타로 하니와를 닮은 불두로 천불을 제작한다.

・4월, 수도여자사범학교( 현 세종대학교 )에 비상근 강사로 근무하게 된다.

1972년도 전기 강의는 응용미술과「 공예」( 목요일)와 회화과「 조소일반」(화요일)을 담당한다. 권진규가 제출한 이력서에는 특기로「 소묘, 입체구성(실내장식), 조각- 건칠(화면), 테라코타- 스타일화」라고 기재되어 있다.

・6월 15일, 명동화랑 김문호사장과 만난다.

매제 허욱인의 추천을 받은 김호연(미술 평론가)은 명동화랑 사장 김문호에게 권진규를 소개한다. 김문호는 권진규에게 6개월간의 제작 지원금(매월 3만원) 제공과 함께 개인전 개최(12 월)에 대한 계약을 한다. 테라코타 외 건칠을 출품하기 위해 기존의 석고형을 이용해 건칠 작품을 제작한다. 권진규는 자신의 작품에 고택의 옛 기와와 같은 색과 질감을 추구하였다. 원수영, 김소춘이 조수로서 작업을 돕는다.

・6월 20일,『 조선일보』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건칠전 준비 중인 조각가 권진규씨」에「 한국에서 리얼리즘 정립하고 싶다」라고 표명한다.

권진규는「 모델의 내적세계가 투영되려면 인간적으로 모르는 외부모델을 쓸 수 없으며, 모델+작가= 작품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라고 모델과의 관계를 주장했다. 귀국 동기에 대해서는

「 무사시노의 스승이며, 로댕 정통을 그의 제자 브르데르에게서 물려받은 시미즈 다카시 선생 아래서 8년 동안 수학하다가 탈바꿈의 내적 요청때문에 귀국했습니다. 결국 시미즈 선생의 영향을 극복하여 저 나름으로 성공을 거둔 것으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라고 얘기하며, 토착화에 성공했으며 불교적 세계로의 고뇌어린 침잠(沈潛)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또,

「 예술가는 이해해주는 곳으로 가야 하나 봅니다. 될 수만 있으면 조국에 있고 싶습니다. 조국 화단의 몰이해로 창작 활동이 막다른 골목에 부딪쳤음을 깨달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라고 푸대접 받는 기분을 밝혔으며, 테라코타 제작에 대해

「돌도 썩고, 브론즈도 썩으나 고대의 부장품이었던 테라코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잘 썩지않습니다. 세
계최고의 테라코타는 1만년전의 것이 있지요. 작가로서 재미있다면 불장난에서 오는 우연성을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다는 점과 브론즈 같이 결정적인 순간에 딴사람(끝손질하는 기술자)에게로 가는게 없다는 점 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한국의 조각계와 조각에 대한 평소의 신념에 대해서는

「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정립하고 싶습니다. 만물에는 구조가 있습니다. 한국 조각에는 그 구조에 대한 근본탐구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조각은 신라때 위대했고 고려때 정지했고 조선조때는 바로크(장식화)화했
습니다. 지금의 조각은 외국 작품의 모방을 하게되어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불쌍합니다」

라고 표명한다.

・12월 10~16일, 명동화랑에서 개관 1주년기념 초대전「 권진규 조각작품전」을 개최한다.

권진규는 이 전람회에 테라코타 24점, 건칠로 만든 불상 11점, 석조3점을 출품한다. 남관, 김서봉, 김비함, 김형구, 김창억, 박득순, 김종학, 박고석, 박서보, 유영국, 윤명로, 천경자 등의 화가와 강태성, 김영중, 김세중, 김정숙 등의 조각가, 류강열, 김영태 등의 공예가, 건축가 김수근 외 고려대학교 박물관 학예원 이규호, 미술평론가 유준상 등 당시의 미술계를 대표하는 이들이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일반적인 평가는 지극히 냉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권진규 자신의 평가가 가장 혹독했다. 서양의 근대 조각 기법에 동양의 정신 세계를 융합시킨「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정립시키고 싶다」라고 분발하며 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자타 모두가 납득할 수 없는 것들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자신의 작품 활동이 석조에서 시작했고 테라코타를 만나 다양한 기법과 양식을 시도했으며 마지막으로 테라코타의 석고형을 부수면서 만드는 건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건칠 작품조차도 그다지 만족할 정도가 아니었다. 이렇듯 자신이 목표로 하는 작품과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작품이 확연히 달라 자기 변호의 갈등에 빠진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작품 제작의욕을 잃게 된다. 이후로 권진규의 아틀리에를 방문한 박혜일과 안동림은 만들다 말고 포기한 채로 있는 작품 몇 점을 보았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나 외로움 보다도「 자신의 작품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생기는 제작 의욕의 소멸」, 이것이 결과적으로 권진규 자신을 파멸의 길로 들게 한 이유였을 것이다.

이 때 처음으로 권진규의 작품을 본 이규호(고려대학교 박물관 학예원)는 테라코타의 묘미를 느꼈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1973년에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전시하게 될 현대 작가의 작품으로 권진규의 작품을 선택하게 된다. 이것이 당시 권진규에게 작은 자기기만이고 자기보호 의 버팀목이었을지도 모른다.

국민대학교 축산과 2학년 김동우는 우연히 방문한 이 전람회에서 권진규의 작품에 매료되어 조각에 흥미를 갖고 권진규의 아틀리에를 드나들게 된다. 대화는 거의 없었지만, 기분이 좋을 때는 일본 유학시절 이야기를 했다. 거울 두 개를 보면서 자소상을 만들도록 하고 지도할 때는 아무 말 없이 헤라를 빼앗아 손댔다. 다음 해 봄, 김동우는 대학을 자퇴 하고 미대에 재입학하고자하나, 권진규는「 한국의 대학에서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정히 진학하고 싶다면 무사시노미술대학에 추천장을 써 주겠다」라고 해, 김동우는 진학을 포기한다. 또「 예술은 기법이나 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부터 실현되는 것이다」,「 여자를 멀리해라. 그러면 조각이 좋아지고, 오랫동안 작업할 수 있다. 나는 실패했다」,「 작품을 관리하듯이, 자신의 인생도 관리한다(작품의 소성이 좋지 않으면 부수듯이)」,「 내가 죽으면 기뻐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작품의 가격도 오를 것이고」 등의 말을 자주 했다.

・이 때에는 작품 제작보다는 독서와 음악 감상에 몰두한다.

대학에서 예술 개론을 배웠던 가타야마 도시히코(片山敏彦)가 번역한 로망 로란의『베토벤의 생애』 (이와나미문고( 岩波文庫), 1938년) 와『 반야심경』을 반복해 읽었다. 음악은 베토벤 등의 클래식 외에도 바흐 이전의 종교음악과 유준상으로부터 빌린 윤이상의 음악도 자주 듣는다.

또한, 아틀리에의 벽에「범인에게는 침을, 바보에게는 존경을, 천재에게는 감사」라고 쓴다. 자기 비판적이기도 하며 미술계 전체를 경멸하는 내용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동생 경숙에게「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은 뛰어난 작품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간의 아이는 언젠가 죽지만 내가 만든 아이(작품)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는 말을 여러 번 한다.

1972년(51세)

・3월 3일,『 조선일보』의 시리즈 기사「예술적 산보」 화가의 수상⑧에「노실( 爐室) 의 천사를 작업하며 읊는 봄, 봄」을 발표한다.

・3월 16일, 수도여자사범학교 응용미술과의 과대표 김정제(3학년) 가 권진규의「 공예」(목요일) 수업을 수강한다.

권진규는 수업 중에「작품에 대한 강한 표현, 자유로운 표현, 동양적인 표현」을 강조하며 그것들이 작품에 반영될 것을 요구한다.

・3월, 이중섭(1916~1956) 의 15주기 유작전「이중섭전」(현대화랑, 3 월 20~26일)을 다녀온다.

이 전람회에서 권진규는 이중섭의《황소》 (1953년, 지본유채)와《흰소》 (1954년경, 지본유채)을 보고 가지고 있었던『 황순원전집』제2권 (창우사, 1964년 11월) 내지에 스케치해 그 후,《 황소》를 모본으로 한 《숫소( 雄牛)》 (테라코타)를 제작한다. 이중섭과 박수근의 그림을 칭찬하며 말이나 소, 게 등을 수묵으로 그린다(No.D31~D36).

또, 수도여자사범학교의 수업에서 이쾌대, 이중섭의 작품을 평가하며, 서양 미술을 그대로 흉내낸 작가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이는 서양의 근대미술의 한국화, 토착화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국전 등에 출품하지 않는 이유로 자신의 작품을 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즈음부터 기존의 평가 기준을 인정하지 않고, 외국미술의 카피를 엄하게 비난하는 발언이 증가하며 자신의 제작에 대한 의문이나, 자신의 작품을 비하 하는 발언도 많아진다.

· 5월 18일, 금연을 시도한다.

또, 고혈압에 신경쓰며「 북방(만주?) 사람들은 생양파를 자주 먹어 고혈압이 적은 것인가」라고 하면서, 양파를 생으로 잘 먹었다. 영양에 좋다고 개고기도 좋아했다.

・6월 15~17일, 수도여자사범학교 응용미술과의 스케치 여행에 참가한다. 영주의 부석사, 희방사를 방문한다.

・6월 23일, 캐나다전시회의 카탈로그 제작에 들어간다.

권진규는 캐나다에서 전람회를 개최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7월에 중지한다는 통보를 받고 실망한다.

・7월,《 등나무 꽃을 가진 여인과 차륜》를 드로잉하고 시멘트릴리프를 제작한다.

・7월 28일경, 김정제에게 서간을 보낸다.

그 편지에는

「 모든 것을 昇華시키는 저 불 보면서 羅代의 陶工들은 달빛아래서 制作했겠지. 달은 같은 달인데 羅代의 陶工들과 對話를 나눈다. 아! 이 행복」,「 정제한테서 두 個 附託받았는데 爐室의 神秘, 아 ~神이여. 成功하리라. 그러나 結果는 如意치 않다. 우선 한 個만 집에 다 安置하였다. 은 어지간한데 形體는 마음에 든지. 이 정도로 참아야지. 아틀리에서는 두 學生이 토닥거리며 地上 天國을 造成하고 있지만 한 學生은 東海에 물러가고 수형만 남아있다. 고독하리라」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 즈음, 동국대학교 문명대교수는 권진규의 아틀리에를 방문해 사명대사 동상 제작을 의뢰한다.

1966년에 설립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에 의해 건립된 15구의 동상(1968~1972년) 중 1968년 5월에 건립된 서울 장충단 공원의《사명대사동상》이 사명대사의 이미지와는 다르며 예술성의 결여 등이 문제 제기된다. 이에 1972년 봄, 동국대학교의 문명대교수를 중심으로 새로운 동상의 건립을 위한 위원회가 학내에 결성되었다. 문 교수는 새로운 동상의 제작을 의뢰하고자 권진규의 아틀리에를 방문한다. 권진규는 문교수의 제안을 승낙했지만, 학내의 의견이 결정되지 않아 결국 없던 일로 되어 버린다. 홍익대학교에서 권진규에 사사한 김광진에 의하면 권진규는 안중근 내지 김구의 동상을 제작하고 싶어했던 듯 하다.

・8월 19일, 다시 양산 통도사를 방문한다.

・8월 20일, 스스로 가마를 부수고, 석고작품《조국》을 밖에 내어 비를 맞춘다.

권진규는 등나무를 자르고, 스스로 아틀리에의 가마를 파괴한다. 또, 석고《조국》을 밖에 방치해 비를 맞춘다.

・9월 1일, 자살을 암시한다.

1일, 권진규는 아틀리에에서 김정제 등 학생들에게「 부모가 아이를 위해서 죽을 수 있듯이 나는 나의 작품을 위해서 죽겠다」라는 발언을 처음으로 한다. 6일에도 자살을 암시하는 발언을 계속한다.

・11월, 김정제에게 보내는 편지에「 유언」을 적는다.

권진규는 김정제에게「 유언」이라고 쓴 편지를 보낸다.

 

「 정제에게,

마지막 천사였던 님 정제

인생은 무

슈베르트의 미완성을 들으며 작별 합니다.

1972년 11월 일 정오」

 

・12월, 고혈압으로 병이 깊어져 진단을 받는다.

김문호사장이 권진규를 한의사 최충중에게 진단받게 한다. 고혈압, 신경성 수전증, 신장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당시 건강에 대해 고혈압의 영향으로 신장의 동맥경화가 생겨 신장의 기능이 쇠약해지면서 신장 동맥경화증으로 발전했다는 증언도 있다.

1973년(52세)

・1월~2월,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현대미술실에 소장되는 작품을 요청하고자 관장과 학예원 이규호가 권진규의 아틀리에를 방문한다.

1월 19일, 학예원 이규호가 아틀리에를 방문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권진규의 작품을 소장하고 싶다는 의지를 전한다. 이에 대해 권진규는 매우 기뻐한다. 22일, 관장과 함께 다시 방문한 이규호는《마두》와《자소상》 (1969~70 년, No.87)을 선정해 박물관으로 옮긴다. 29일, 사례금으로 15만원을 지불하며 작품을 한 점 더 기증해 줄 것을 의뢰하지만 권진규는 사절한다.

2월 3일, 이규호는 몇 차례에 걸쳐《비구니》 (1970 년, No.88)를 추가 요청한다. 또, 그 자리에서 핵물리학자 박혜일(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을 소개한다. 다음 날, 박혜일이 아틀리에를 다시 방문했을 때, 비닐에 덮여 제작중인 것으로 보이는 나부상의 표면이 말라 있어 최근 얼마간 작품을 제작하지 않고 있음을 느낀다. 박혜일이 소품 2점의 작품대금으로 7만원을 건네주자, 권진규는「 작가는 작품을 팔아서 생활하면 안되는데」라고 말을 흐리면서「 작품이 없어질 때마다 슬프다」라고 말한다. 박혜일이「 빨리 회복해서 작품을 만들면」이라고 얘기하자 「( 생명이)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

2월 6일, 다시 이규호가 아틀리에를 방문해《 비구니》를 가져오며 영문학자 안동림(고려대학교 강사)을 소개한다. 9일, 이규호는 권진규에게 종합 진단을 받도록 권유한다. 김문호, 권옥연에게 상담하지만 권옥연은「몸의 병보다 마음의 병을 먼저 고쳐야 할 것이다」고 말한다.

・3월 24일, 안동림, 이규호, 박혜일, 고승관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한다.

안동림의 집에서 함께 한 이 저녁 식사모임에서 홍익대학 공예과를 졸업한 고승관이 시작한 한자 운세에 모두가 흥미를 느끼는 가운데, 권진규는「死」라고 쓴다.

・3월 28일,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연주회를 다녀오다.

브람스와 베토벤의 음악이 연주되는 두번째 날을 선택해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연주회를 다녀온다. 박혜일, 안동림과 베토벤의 음악이나 전기, 또 도쿄에서 들은 오케스트라와 비교하는 등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4월 초, 김비함의 아틀리에를 방문한다.

아틀리에를 방문한 권진규는 여느 때처럼 부민옥의 선지국을 먹으며「비함을 만나 좀 더 살고 싶어졌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간다.

・이 즈음부터 영등포에 있는 누나나 화곡동에 사는 여동생의 집에서 요양한다. 대학의 비상근 강사직을 사임한다.

・4월 23일, 박혜일 앞으로 엽서를 보낸다.

엽서의 글은 다음과 같이 과거형으로 적고 있다.

 

感謝합니다.

나의 人生에 있어서 最後에 만난 힘이 되는 분이였습니다.

遂信 高大 博物館 美術館 開館의 件, 感謝합니다」

 

・5월 3일, 고려대학교 박물관 현대미술실 개막식에 참석한다.

9시에 아틀리에로 온 박혜일과 함께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오후 2시 경에 고려대학교 박물관 현대미술실 개막식에 참석한다. 오후 5시를 지나 고려대학교에 온 김정제를 데리고 이규호, 안동림과 함께 박혜일의 집으로 간다. 저녁 식사 후, 10시 반까지「 탄호이저」 등의 음악을 들으며 보낸다.

・5월 4일, 권진규는 스스로 생명을 끊는다.

아침 8시 20분 무렵, 다시 고려대학교 박물관을 방문해 전시중인 자신의 작품을 본다. 도록을 몇 권 받아 11시 반에 귀가한다. 오후 1시경, 벌써 전날에 써 둔 유서 2통(박혜일과 김정제 앞)을 우송하도록 집안 일을 돕고있는 김영옥에게 부탁하고, 아틀리에에 들어간다. 오후 3시, 유족 앞으로 된 유서와 장례비를 위한 약간의 돈을 남기고 자살한다. 5시경, 권진규가 좋아하는 가마보코(나무판에 붙인 어묵)을 준비해놓고 부르러 간 영옥이 발견하고, 귀가한 조카 허경회에게 알린다.

유족 앞으로 된 유서는 크고 두꺼운 종이에 2 ㎝정도의 붉은 글자로

 

경숙에게,

향후의 일을 부탁한다.

적지만 이것으로 후처리해 주세요.

화장해 모든 흔적을 지워 주세요」

 

라고 씌여 있다.

또, 박혜일의 유서에는

 

「朴惠一 先生,

感謝합니다.

最後에 만난 友人들 中에서 가장 희망的 분이였습니다.

人生은 空,

破滅.

午後6時거사」

 

라고 씌여 있으며, 김정제에게 보낸 유서에는

「廷帝야 정제, 정제, 정제, 정제, 정제,

정 제, 정제, 정제, 정제, 정제, 정제,

정, 정, 정.

人生은 空,

破滅입니다.

거사午後6 時」

 

라고 씌여 있다.

모든 봉투에「 5월 3일」이라고 쓴 것을「5월 4일」로 정정한 것으로 보아 본래의 계획은 5월 3일 오후 6시에 자살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5월 6일, 장례식을 거행한다.

가족과 그를 소중히 여기는 친구들과 몇 명의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검소한 장례식을 치룬다. 오전 11시에 발인하고, 유언에 따라 화장한 후, 부모님과 형이 있는 망우리 공동묘지(No.201743)에 안장한다.

・6월 21일, 불광동 환희사에서 사십구제를 올린다.

 

●1974년 5월15~19일, 명동화랑에서「 권진규제일주기추모전」이 개최된다. 유작전 추진위원은 권옥연, 김문호, 김정숙, 유준상, 이경성, 이규호, 최만린, 최순우였다. 유작전을 본 매제 허빈 (허욱인)은 권진규를 생각하며 시를 남긴다.

 

展示會


古風이/비에 씻겨/오늘의/古宮이 되었다.
丹青은/새로 입혀/초라한/現代色은/古色을 삼키었다.
東海를/실어 놓은/잔디 위에/洋夷의/발자욱이/나를 찍는다.


당신의/分身은/나를 삼키었소.
처음으로/또 마지막으로/놀린/당신의 혀는/내 귀를/압도하였소.
조각난/당신의/다른 당신은/당신이/죽어서/나의 눈을/시리게 하였소.
赤과 黑의/당신/自刻像은/내/당신의/맥박을 짚었듯
나의 온 몸을/살며시/더듬는/것이었다오.


나오는/나의/발은/발자국을/남길 수 없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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